[심층취재] 대구는 안경을 만들지만 시장은 만들지 못했다

김경훈 대기자 / 기사승인 : 2025-04-04 15:4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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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경쟁력은 왜 가격 결정권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안경테부터 렌즈까지 완벽한 생태계 갖췄지만, 시장 전략 부재가 '성장판' 닫아
▲ 대구 안경 산업의 특징은 비교적 높은 기술 수준을 가진 중소 제조 기업이 많다는 점이다. (사진 = 소상공인포커스 DB)

 

 

한국 제조업을 이야기할 때 지역 산업의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등장하는 곳이 대구 안경 산업이다. 대구 북구와 침산동 일대에는 오랜 기간 안경 제조 기업이 밀집해 있었고 한때 이 지역은 국내 안경 생산의 중심지로 불렸다. 실제로 한국 안경 산업의 상당 부분이 이 지역에서 형성되었고 많은 기업이 이곳에서 생산 기반을 구축하며 성장해 왔다. 안경 프레임을 만드는 기업과 렌즈 기업, 그리고 다양한 부품 가공 기업이 하나의 산업 생태계를 형성하면서 지역 산업 집적 효과가 나타났고 이러한 산업 집적은 한동안 한국 안경 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대구 안경 산업의 특징은 비교적 높은 기술 수준을 가진 중소 제조 기업이 많다는 점이다. 오랜 기간 축적된 생산 기술과 디자인 경험을 바탕으로 상당한 수준의 품질 경쟁력을 확보한 기업들이 존재한다. 실제로 국내 안경 제조 기업 가운데 상당수는 해외 브랜드 제품의 생산을 담당하고 있으며 일부 기업은 세계 시장에서도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 경쟁력이 산업 전체의 성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기술력은 존재하지만 시장을 지배하는 구조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단순히 특정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 구조의 문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많은 중소 제조기업이 일정 수준 이상의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위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술은 생산 능력으로 남지만 시장 전략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기업은 생산 능력을 기반으로 경쟁하게 되고 시장에서의 협상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대구 안경 산업의 생산 구조를 살펴보면 이러한 특징이 비교적 분명하게 나타난다. 많은 기업이 OEM (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한다. OEM 구조에서는 브랜드 기업이 제품의 설계와 판매를 담당하고 제조 기업은 생산을 담당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생산 기업이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더라도 시장 가격을 직접 결정하기 어렵다. 제품 가격은 브랜드 기업이나 유통 기업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제조 기업은 생산 효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경쟁하게 되고 시장 전략을 스스로 설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구조는 한국 제조업 전반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자동차 부품 산업이나 전자 부품 산업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중소기업이 글로벌 기업의 공급망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독자적인 브랜드를 형성하거나 시장을 직접 개척하는 기업은 상대적으로 적다. 산업 구조가 납품 중심 공급망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 한국과 대만, 두 제조 강국의 안경 산업 운명을 가른 결정적 차이는 ‘시장 설계’에 있었다.(사진 = 소상공인포커스 DB)


 

이와 비교되는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국가가 대만이다. 대만 역시 과거에는 OEM 중심 생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많은 기업이 해외 브랜드 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성장했고 초기 산업 구조 역시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기업은 생산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브랜드 기업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산업 정책과 시장 구조였다.

 

대만 안경 산업 역시 이러한 변화 과정을 경험했다. 일부 기업은 디자인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자체 브랜드를 개발했고 다른 기업은 글로벌 유통망과 직접 연결되면서 시장 협상력을 높였다. 이러한 변화는 개별 기업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산업 정책과 산업 네트워크가 함께 작동한 결과였다. 특히 산업 클러스터 (Industrial Cluster, 산업 클러스터) 구조는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산업 클러스터는 같은 산업에 속한 기업들이 특정 지역에 모여 협력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산업 구조를 의미한다. 기업들은 기술과 정보를 공유하며 서로 협력 관계를 형성하고 이러한 협력은 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대만의 경우 안경 산업뿐 아니라 자전거 산업과 전자 부품 산업에서도 이러한 구조가 형성되어 있으며 산업 전체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움직이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산업 네트워크는 기업이 단독으로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부담을 줄여 준다. 기업들은 협력 관계를 통해 기술 정보를 교환하고 공동으로 시장 전략을 고민할 수 있다. 또한 산업 협회나 무역 기관을 통해 해외 시장 정보가 공유되기 때문에 중소기업도 비교적 쉽게 해외 시장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기업이 단순한 생산 기업에서 벗어나 시장 전략을 설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다.

 

▲ 한국과 대만, 두 제조 강국의 안경 산업 운명을 가른 결정적 차이는 ‘시장 설계’에 있었다. 단순 생산 기지에 머물며 유통망에 종속된 대구와 달리, 산업 클러스터 네트워크를 통해 독자적 브랜드로 전환에 성공한 대만의 사례는 우리 제조업이 나아가야 할 이정표를 제시한다..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입니다.(사진=한국안광학산업진흥원 홈페이지 영상 갈무리)


 

한국 안경 산업 역시 한때 이러한 클러스터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글로벌 시장 구조의 변화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특히 글로벌 브랜드 기업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많은 제조 기업이 납품 구조 안에 머무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시장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위치를 확보하기 어려워졌다. 이러한 현상은 안경 산업뿐 아니라 많은 제조 산업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결국 산업 경쟁력은 기술 경쟁력과 시장 구조가 함께 작동할 때 만들어진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시장 구조 안에서 가격 협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기업의 성장 가능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시장 구조 안에서 협상력을 확보한 기업은 기술 개발과 브랜드 전략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으며 산업 전체의 성장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대구 안경 산업은 이러한 산업 구조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기술 경쟁력은 이미 충분한 수준에 도달했지만 시장 구조가 그 기술을 산업 성장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기술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가 아니라 기술이 시장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산업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있다.


앞으로 한국 제조 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업을 단순히 지원하는 정책을 넘어 산업 구조 자체를 재설계하는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중소기업이 시장에서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유통 구조와 브랜드 전략, 그리고 산업 네트워크를 함께 고려하는 정책 접근이 요구된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가 이루어질 때 기술 경쟁력은 단순한 생산 능력이 아니라 산업 경쟁력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정보 코너

안경 산업 시장 구조 이해
OEM (주문자상표부착생산)
브랜드 기업이 제품 설계와 판매를 담당하고 제조 기업이 생산을 담당하는 방식으로 제조 기업은 생산 기술을 확보하지만 시장 가격을 직접 결정하기 어렵다.
ODM (제조자개발생산)
제조 기업이 제품 개발과 생산을 함께 담당하는 방식으로 브랜드 기업에 제품을 공급하지만 기술 개발 능력이 기업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Global Brand (글로벌 브랜드)
기업이 자체 브랜드를 통해 해외 시장에서 직접 제품을 판매하는 구조로 시장 가격과 유통 전략을 기업이 직접 결정할 수 있다.
Industrial Cluster (산업 클러스터)
특정 지역에 관련 산업 기업이 모여 협력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산업 구조로 기술 협력과 정보 공유를 통해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특징이 있다.


 

소상공인포커스 / 김경훈 대기자 kkh429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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