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분석] 한국은 왜 납품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김경훈 대기자 / 기사승인 : 2025-09-02 16: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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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지원이 시장 지배력을 만들지 못한 이유
'행사 중심'의 관성 깨고 지속 가능한 산업 생태계 만드는 플랫폼 설계 필요
▲ 한국 제조업은 반도체와 자동차 등 주요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공정 기술과 품질 관리 능력을 확보했으나, 스스로 시장 가격을 결정하고 판을 짜는 '시장 설계자'로서의 지위는 여전히 확보하지 못한 채 납품 중심의 구조에 머물러 있다.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사진=한국산업기술진흥원 블로그 갈무리)

 

 

한국 제조업은 오랫동안 높은 생산 경쟁력을 가진 산업 구조로 평가받아 왔다. 반도체, 자동차, 기계 산업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은 짧은 시간 안에 생산 체계를 구축하고 품질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능력을 보여 왔다. 이러한 능력은 세계 시장에서도 상당한 경쟁력을 가지며 실제로 많은 한국 제조기업이 글로벌 공급망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 구조를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생산 경쟁력과 시장 경쟁력이 반드시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산업에는 생산 능력을 가진 기업이 많지만 시장 가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업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 문제는 한국 제조업 생태계에서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납품 중심 산업 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의 많은 중소 제조기업은 제품 생산 능력을 기반으로 성장해 왔지만 시장에서 독립적인 브랜드를 구축하기보다는 특정 기업이나 유통망에 제품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해 왔다. 이러한 구조는 산업 성장 초기 단계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대기업이 글로벌 시장을 개척하고 중소기업이 생산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산업 규모를 빠르게 확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이 성숙 단계에 접어들면서 이 구조는 또 다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생산 능력은 향상되었지만 시장 지배력은 확대되지 않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여러 산업에서 동시에 발견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구 안경 산업이다. 대구는 한국 안경 산업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으며 수많은 중소 제조기업이 이 지역에서 안경테를 생산하고 있다. 실제로 대구에서 생산되는 안경 제품은 세계 시장에서도 상당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으며 일부 기업은 해외 수출을 통해 안정적인 매출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산업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구에서 생산되는 많은 안경 제품이 자체 브랜드보다는 해외 브랜드의 주문 생산 형태로 시장에 공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업은 높은 생산 능력을 갖고 있지만 글로벌 브랜드를 직접 운영하는 기업은 많지 않다. 결과적으로 산업 규모는 유지되지만 시장 가격을 결정하는 위치는 해외 브랜드 기업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휘트니스 장비 산업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헬스클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러닝머신이나 웨이트 장비는 겉으로 보기에는 특정 브랜드의 제품처럼 보이지만 실제 생산 기업과 브랜드 기업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다. 글로벌 시장에서 널리 알려진 Life Fitness(라이프 피트니스), Technogym(테크노짐), Precor(프리코어) 같은 브랜드는 제품 설계와 유통망을 중심으로 시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생산은 여러 국가의 제조 기업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도 운동기구를 생산하는 중소 제조기업이 존재하고 일부 기업은 해외 시장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그린마스터와 같은 기업 역시 이러한 산업 구조 속에서 운동기구를 생산하고 해외 시장에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기업이 여전히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 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에 의존하고 있으며 독자적인 브랜드를 기반으로 글로벌 시장을 운영하는 기업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히 특정 기업의 전략 문제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산업 구조 자체가 생산 중심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제조업 정책 역시 오랫동안 기술 경쟁력과 생산 능력을 강화하는 방향에 집중되어 왔다. 연구개발 지원 정책과 기술 혁신 지원 정책은 많은 기업의 생산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러한 정책이 항상 기업의 시장 지배력 확대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 능력이 향상되더라도 기업이 시장에서 가격을 설계할 수 있는 위치에 서지 못한다면 산업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비교되는 사례가 대만 제조업이다. 대만 역시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제조업 중심 산업 구조를 발전시킨 국가다. 그러나 산업 발전 과정에서 중소기업의 역할과 시장 구조를 설계하는 방식에서는 한국과 다른 선택을 했다. 대만 기업들은 OEM 중심 생산 구조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ODM(Original Design Manufacturing, 제조자개발생산) 방식으로 산업 구조를 전환해 왔다. ODM 방식에서는 기업이 단순히 제품을 생산하는 역할을 넘어 제품 설계와 기술 개발에 참여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기업의 시장 영향력이 확대될 수 있다.


대만의 휘트니스 장비 기업 Johnson Health Tech(존슨헬스테크)는 이러한 산업 구조 변화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기업은 Matrix(매트릭스), Horizon(호라이즌) 같은 브랜드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헬스클럽과 피트니스 센터에 장비를 공급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 기업이 단순히 운동기구를 생산하는 제조기업이 아니라 제품 설계와 브랜드 전략을 동시에 운영하는 산업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기업이 생산 능력뿐 아니라 시장 전략을 동시에 설계할 수 있으며 산업 생태계 역시 생산 중심 구조에서 시장 중심 구조로 확장될 수 있다.


결국 한국 제조업이 직면한 문제는 기술 경쟁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한국에는 이미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생산 능력을 가진 중소 제조기업이 존재한다. 문제는 이러한 기업이 시장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생산 능력을 가진 기업이 시장 가격을 결정하는 위치에 서지 못한다면 산업 경쟁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한국 산업 정책 역시 이 질문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정책이 기업의 생산 능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앞으로의 산업 경쟁력은 생산 능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업이 시장 구조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그리고 산업 정책이 기업이 시장을 설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산업 경쟁력은 공장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장을 설계하는 능력과 산업 구조를 조직하는 능력이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경쟁력이 형성된다. 한국 제조업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생산 중심 산업 구조를 넘어 시장 중심 산업 구조로 이동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 출발점은 기술이 아니라 산업 구조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일지도 모른다.

 

 정보 코너

OEM (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 주문자상표부착생산)
다른 기업의 브랜드 제품을 대신 생산하는 제조 방식으로 생산 기업이 제품을 만들고 브랜드 기업이 시장을 담당하는 산업 구조를 의미한다.
ODM (Original Design Manufacturing, 제조자개발생산)
제품 생산뿐 아니라 설계와 개발 단계에도 참여하는 제조 방식으로 기업이 기술과 설계 능력을 동시에 확보하는 산업 구조다.
Global Supply Chain (글로벌 공급망)
제품 설계, 생산, 유통 과정에 참여하는 국제적 기업 네트워크를 의미하며 현대 제조 산업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소상공인포커스 / 김경훈 대기자 kkh429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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